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구로다 요시타카 (문단 편집) === 전성기 === 악전고투 끝에 아리오카 성에서 구출된 후 구로다는 히데요시의 군사로서 종횡무진 활약한다. 다만 군사라고 해도 일본의 군사는 중국의 군사와는 다른 개념으로 주로 후방 보급이나 적에 대한 교란책 등을 담당하는 일종의 보조지원 역할이며 그의 이러한 면모가 가장 두드러진 것은 1582년의 이른바 '주코쿠 대회군(中国大返し)'이다. 1582년, 오다 노부나가가 [[혼노지의 변]]으로 죽자 모리 군과 대치 상태였던 당시 히데요시는 심히 당황한다. 눈앞에는 당장 그때까지 공격하던 모리군이 있는 데다 한편으로는 재빨리 [[아케치 미츠히데]]를 토벌하지 않으면 다른 경쟁자들이 노부나가의 후계자로서 큰 소리를 칠 것이 뻔한 상황. 이 때 간베에는 히데요시에게 '지금이 천하를 차지할 절호의 기회(天下を取るべき好機ではないか)'라고 부추기며, 미츠히데를 즉각 끌어내리고 오다 노부나가의 후계자로 우뚝 설 기회임을 적극적으로 어필하였고, 간베에 본인은 모리군과 강화를 맺고, 강화 교섭에도 직접 나서 주도적으로 세력간의 경계를 정하고 한편으로는 모리 가의 장수 [[시미즈 무네하루]]의 할복을 받아낼 정도로 활약한다. 그리고 이 회군(주코쿠 대회군)은 히데요시가 일본 천하를 차지하는 최대 수훈갑이 된다. 노부나가가 사망함으로서 '''발등에 불이 붙은 건 자신들 히데요시 측'''이었다. 주군 히데요시마저 냉정함을 잃은 상황에서 유독 혼자 냉정침착함을 유지하였고, 모리와의 교섭에서도 지나칠 정도로 멋지게 성공한 점, 섬기던 노부나가가 사망하자마자 천하를 차지하자고 이야기하는 것이라든지, 원래 두드러졌던 뛰어난 지략 등이 기화가 되어, 오히려 히데요시는 그를 경계하게 된다. 아울러 여담이지만 결과적으로 속았다는 것을 알게 된 모리는 분통을 터뜨리며 히데요시 군의 후미를 추격하려 했으나 모리 측의 걸출한 인물인 [[코바야카와 타카카게]]가 이를 반대하였다고 한다. 타카카게는 조약서의 먹이 마르기도 전에 조약을 깨는 것은 바르지 못하다는 '의'를 앞세운 명분과, 이미 대세는 히데요시에게 기울었으니 히데요시에게 빚을 하나 더 만들어두는 편이 이롭다는 '실'의 이치로 당주를 설득하였고 이 설득이 결과적으로 모리 가를 살린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